박완서의 글은 담담합니다. 그녀의 소설 몇몇은 그녀의 기억을 고스란히 내려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그녀는 그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와 함께 현저동에서 살았습니다. 이는 그녀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어디있을까?>의 주인공의 삶과 얼추 비슷합니다. 작가의 경험은 당시의 역사적 흐름속에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로 형상화됩니다. 징병 후 심신이 미약해진 오라버니,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가족들 이야기에서 역사의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삶을 쓰고 싶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박완서 작가는 그 누구보다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따뜻하게 품었던 작가로 기억됩니다.
박완서(1931~2011)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등단하여 ‘뒤늦은 데뷔’로 주목받았지만, 그 이후로 정치, 사회, 가족, 여성, 전쟁, 소비문화 등 한국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왔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눈에 띄는 수사나 장엄한 표현 없이도, 일상 언어와 간결한 문장 속에서 현실을 찌르는 힘을 가졌습니다. 특히 여성으로서 경험한 한국 사회의 모순과 차별, 분단과 전쟁의 상처, 신자본주의와 소비사회에 대한 불편한 진실 등을 ‘비판’이라기보다는 ‘묘사’를 통해 드러내는 문체가 큰 특징이죠. 오늘 포스팅에서는 박완서 작가의 대표작 3편을 중심으로 그녀의 문체가 어떻게 현실을 해부하고, 사회를 비판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남기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1. 『나목』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슬픔”
박완서의 첫 장편소설 『나목』(1970)은 한국전쟁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미술계, 여성, 전쟁의 상흔을 묘사한 자전적 소설입니다.
📌 문체 특징:
- 군더더기 없는 묘사, 감정에 매달리지 않는 차분하고 절제된 시선
- 여성 주인공의 내면과 주변 현실을 담담하게 관찰하는 사실주의 서술
📌 현실 비판 포인트:
- 전쟁 직후 한국 사회의 혼란, 부조리한 미술계 구조, 여성에 대한 이중적 시선
- 사랑조차 ‘의미 없는 애착’처럼 묘사됨으로써 감정 소비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의 비극을 전달
💬 “주인공은 사랑을 하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 작가 특유의 내면 성찰 + 시대 고발이 동시에 드러나는 대표작
✅ 2.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기억과 분단, 여성의 시선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성장 과정을 담은 회고록적 성격의 장편 소설입니다.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녀가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게 되는지’의 여정을 서술합니다.
📌 문체 특징:
-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담담하고 섬세한 회상체 문체
-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시대를 비판
📌 현실 비판 포인트:
- 분단의 상처,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교육의 불균형
- 특히 여성의 삶에 내재된 불평등을 어린 시선으로 간접 비판
- 주인공의 언어는 순진하지만, 그 속에 사회에 대한 뼈 있는 성찰이 담김
💬 “나는 자라면서 불편한 것들이 당연하다고 배우는 것이 가장 불편했다.”
→ 박완서의 사회 비판은 언제나 일상 속에 숨어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
✅ 3.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가족, 기억, 여성의 언어
박완서 작가의 말년 작품 중 하나로,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겪은 후 삶과 죽음, 가족과 상실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담은 소설입니다.
📌 문체 특징:
- 반복과 여백을 살린 서정적이면서도 깊은 문장 구성
- 회상과 현재가 교차하며 감정이 물처럼 흐르도록 구성
📌 현실 비판 포인트:
- 남성 중심의 가족 구조에서 여성이 겪는 침묵과 희생
- 개인적 아픔을 통해 사회적 구조의 모순을 비춰냄
💬 “산은 늘 거기 있었는데, 나는 왜 이제야 그 높이를 알게 되었을까.”
→ 개인 서사를 통해 시대와 구조를 들여다보는 박완서의 마지막 목소리
박완서의 작품을 읽고 나면,
크게 감동받기보다는 잔잔한 아픔이 오래 남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말보다 현실을 더 믿었던 작가이기 때문일 겁니다.
강렬한 문장보다, 조용한 진실을 택했던 박완서.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묘사만으로도 비판이 무엇인지 드러낼 줄 아는 작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완서의 문학은 단순한 여성문학이나 시대소설이 아닌, 사람과 삶, 그리고 사회를 정직하게 마주했던 '인간학적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글을 통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 번 세상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박완서 작가의 문학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녀의 문체와 주제가 시대 변화와 맞물리며 계속 진화했다는 점입니다.
1970~1980년대에는 한국전쟁의 상처와 산업화 속 여성의 위치를 고발했으며,
1990년대 이후로는 소비주의, 계층 갈등, 노년의 소외, 죽음에 대한 성찰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결코 도식적인 구호나 명확한 비난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삶’을 포착하며 그 속에서 현실이 가진 모순을 드러내는 힘을 보여줬죠. 이러한 점은 그녀의 문학이 2020년대를 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젊은 세대에게도 새롭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박완서는 여성 문학의 정체성을 확립한 작가로서, 한 여성이 겪는 감정, 사회적 억압, 가족 내 역할, 자아 찾기 등을 누구보다 진솔하고 담백하게 그려냈습니다. 이는 단순히 여성문학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줍니다.